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아돌프 히틀러|이 남자]]는 누구인가 === 괴벨스가 당 활동을 시작할 즈음인 1924년 12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참여한 연합정당[*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N'''ational'''s'''ozialistische '''F'''reiheits'''b'''ewegung; NSFB). 뮌헨 폭동으로 나치당은 불법화되었던 탓에 단독이 아닌 연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바이마르([[라이히]]) 의회의 연합의석 14석(3.0%) 가운데 나치당 몫은 고작 2석이었다. 사실 5월 총선에서는 6.5%로 32석(제6당)을 벌었는데 의회가 몇 달 만에 해산하고 재선거를 해서 도루묵.]은 듣보잡 지지율을 찍었다. 괴벨스는 당이 불법화되어 강제해산된 터라 입당하지 못한 상태였고 1924년 말 히틀러가 출소하고 1925년 초에 [[나치당]]이 재건되어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입당한다. 괴벨스는 이해 3월 북부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의 '사무장' 으로 취임한다. 괴벨스는 노동자 계층이 많은 북독일 공업지대에서도 과격한 선동으로 [[팬덤]](...)을 늘려나가는 한편 당 내 과격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폭력이 난무하는 [[독일 공산당|공산당]] 집회 깽판에도 직접 참가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패거리에선 '좌파' 성향으로 분류했던지 같이 일하라고 카를 카우프만이라는 당직자를 괴벨스에게 붙여주었고, 그래서 괴벨스는 당 내 두 분파주의 중 '민족주의, [[사회주의]] 중 무엇이 우선이냐'의 논쟁에서 후자 편에 섰다.[* 나치당 내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공산주의나 사회민주당과 사이가 가까운 건 아니었다. 나치당 내 사회주의 계파는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선을 조국과 민족이 없는 국제유대인들의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독일 민족의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지 않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좌파도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지지층이 겹치는 공산당을 공격해야 했다. 물론 당 내 우파에서도 당연히 주적이라 공산당을 때려잡는 데 적극 나섰다.] 괴벨스는 나치즘과 독일의 적은 증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다. 나치당 내 민족주의 우파 계열에선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계층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를 제거하여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그런 다음 사회주의를 하자라고 주장했던 반면, 괴벨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은 '그건 말도 안 된다. 노동자를 어떻게 갑자기 민족주의자가 되라고 설득하느냐? 먼저 부르주아들을 쳐 없애버리고 사회주의를 완성한 다음 초계급적 민족국가로 가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사상은 엘베펠트 관구장 성향과 충돌을 빚었고 당에서 쫓겨날 위기에까지 몰렸다. 당 관구 내 괴벨스 반대자들은 괴벨스를 과격하다 하여 '''[[로베스피에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슈트라서의 비호로 반대파였던 관구장을 몰아냈고 괴벨스는 나치당 내 '''좌파'''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곧 그는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괴벨스> 저자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의 주석에 따르면 사실 두번째 만남이다. 나치당 회의로 몇 달 전에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일기에는 묘사되지 않음. 실제로 회의에 같이 참가를 했다는 것이지 대화를 나눴다거나 하는 여부는 분명치 않다.] >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인반신|반은 인간이요 반은 신이다]]. 진정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례 요한]]? > 이 사람은 왕이 될 모든 덕목을 갖추었다. 타고난 민중의 보호자([[호민관]])요, 미래의 독재자[* 히틀러 추종자들은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의 주인공 호민관 역할 리엔치를 종종 히틀러와 비교했다. 따라서 독재자도 로마시대 관직 [[독재관]]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이다. 애초에 입당 전부터 히틀러 빠였다. 다만 히틀러의 저서인 [[나의 투쟁]]을 읽으면서 총통의 예지에 감탄했음에도 100% 히틀러의 주장에는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인종론과 [[소련]][* 괴벨스는 레닌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독일 공산당처럼 유대인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러시아]] 민중에 자유를 주었다'라고 생각했다.]에 대해선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믿기로 한 [[아돌프 히틀러|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앞에서 그런 '''사소한 차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1925년 말과 1926년 초 두 번에 걸쳐 당강령이 지나치게 '''우편향'''이라는 의견을 모은 당 내 좌파들이 히틀러에게 노선 조정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강령은 바꾸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로 가득 차있지만 [[기독교]]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거절했다. 나중에 [[어른의 사정]]으로 조금 바꾸긴 했다.] 독일 [[제2제국]] 시절 군주와 영주들에 대한 토지보상에 반대하는 좌파들과 달리 ''''사유재산을 존중해야지''''라고 말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괴벨스는 약간 실망을 표현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엔 변함이 없었다.[* 히틀러의 좌우 성향이라는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게 가방끈이 짧아서 인종론을 제외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였고 1920년대 초반 연설에서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전쟁 틈에 벼락부자와 부당이득자는 목을 매달아야 한다!!\''''라는 좌파적 발언도 나왔지만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변했고 계급투쟁에 연상되는 발언을 들으면 ''''그딴 건 볼셰비즘이야!!\'''' 하며 반대를 분명히 한다. 나중에는 당 내의 노선에 대해서 [[지도자 원리]]를 강조하며 ''''내가 곧 이데올로기다\''''라고 [[메시아]] 선언을 해버린다. 권력에는 장사 없다. 애초에 나치당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민족(국가)사회주의로 지금의 사회주의라 보기도 어렵고, 민족주의도 인종론 기반이라 지금의 민족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21세기 [[한국]] 기준 용어를 가지고 히틀러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건 별 의미 없는 논쟁이다.] * 흔히 잘못 알려진 설로 당 내 히틀러와 반대편에 있던 괴벨스가 갑자기 자기 진영을 뒤통수 치고 히틀러에 붙은 걸로 나오지만 사실은 애초 입당 전 실업자 상태일 때부터 괴벨스는 히틀러 빠돌이였다. 이 설이 널리 퍼지게 된 건 1960년대 초 평전을 쓴 헬무트 하이버의 책에서 후에 나치당에서 쫓겨난 오토 슈트라서와 그레고어 슈트라서 수하 카를 카우프만의 증언을 들어 괴벨스가 갑자기 변심한 걸로 서술한 영향이 큰데, 1990년대 들어 괴벨스 평전을 쓴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는 여러가지 기록을 들어서 이를 부정했다. 일례로 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시점에 괴벨스의 일기에는 히틀러에게 직접 친필 사인이 들어간 [[나의 투쟁]] 양장본을 선물로 받고 감격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2010년에 국내 발간된 이언 커쇼의 《히틀러Ⅰ<의지>》에서도 로이트의 연구를 받아들여 괴벨스 뒤통수설을 부정한다. [[김태권(1974)|김태권]]의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 국내 대중 서적에서도 이런 오류를 답습한 경우가 많다. 당 내 행정가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히틀러에게 숙청돼서 특이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인데, 애초에 슈트라서도 당 초창기부터 히틀러의 당 내 최고 권위에는 훨씬 나중에 숙청 당하기 직전까지는 이견이 없었고 히틀러와 자신 사이의 주종관계를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었다. 나치당 내 히틀러 반대세력이라는 것은 1920년대 초반에 히틀러가 완전히 당권을 장악하고 난 뒤로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주류가 아닌 편'의 대표격이 그레고어 슈트라서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봤자 애초에 주류와 '''히틀러의 총애를 두고 다투는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1926년 실제로 대들었다는 그 사건 직후에도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낯 간지러운 히틀러 찬양사를 썼다.] 외부에서 보기에 나치의 2인자라고도 불린 괴링이고 슈트라서고 간에 히틀러 앞에선 '''개장수 앞의 똥개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애초에 나치당은 2인자가 존재하지 않는 히틀러의 절대명령에 불만이 있으면 나가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기다 당 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전형적인 나치의 생각으론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한다네|토론이나 다수결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것]]이었으므로 서로 자기들이 그분의 뜻과 가깝다고 [[정신승리]]하기 바빴고 당 내에서 피 터지게 싸워도 히틀러는 자기 권위만 침해하지 않는 편이면 방관했다. 결국 당시 괴벨스도 일단 권력을 잡고 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실업자 시절 아무것도 못하는 처지보단 나았으며 자신의 자전적 소설 <미하엘>에서 표현한 대로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 가 중요했다.''' 하지만 본래 가진 사회주의 성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총통에 대한 믿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덮었을 뿐... 어쨌든 당강령 회의를 두고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한 슈트라서 패거리는 이때부터 괴벨스와 나치당 내에서 원수가 된다. > "괴벨스는 이제 히틀러의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벙커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히틀러를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변치 않고 충성을 바쳤다. - 이언 커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